“제조업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. 사업을 정리하려고 합니다.” 수도권에서 철강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김모 대표는 요즘 본업이 뒷전이다. 대신 수완이 좋다는 부동산 중개업자를 소개받아 공장 부지 매각에 공을 들이고 있다. 하지만 공장을 내놓은 지 몇 달이 지났는데 보러 오는 이가 한 명도 없다. 모두 떠나려고만 할 뿐이다.
중소기업판 ‘대퇴출’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다. 고금리와 고물가에 허덕이는 중소기업들이 마지못해 아예 사업을 접거나 휴업을 택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.
2020년에는 전국 산단 중 단 한 곳도 휴업한 기업이 없었다. 하지만 코로나19에 이어 고물가, 고금리, 인건비 상승 등 여파가 강해지면서 중소 제조업체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평가가 나온다. 시화·반월·남동 등 수도권 3대 산단은 국내 제조 대기업의 2~3차 협력사가 몰린 곳이다. 경기 한파 여파로 재무적으로 취약한 중소 제조업체부터 쓰러지면 대기업 부품 조달과 원가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.
연쇄 효과가 큰 전방산업부터 위태로운 모습이어서 우려가 크다. 특히 건설 관련 중소기업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모습이 늘었다. 최근 들어 일감이 눈에 띄게 줄어든 탓이다. 김동우 한국콘크리트협동조합연합회 회장은 “타워크레인, 하이드로크레인 등 건설 현장에서 꼭 필요한 장비 대부분의 대여료가 1년 전과 비교해 100% 이상 올랐다”고 했다.
충청권에서 스테인리스스틸 업체를 운영하는 김모 대표도 “지난해엔 이자가 크게 올랐어도 그 전에 받아 놓은 일감을 소화하면서 버틸 수 있었다”며 “올해도 금리는 계속 올라갈 텐데 일감은 반토막 이상 나 ‘내일’을 기약하기 힘들다”고 푸념했다.
긴박한 처지는 각종 통계로도 드러난다. 대법원 통계 월보에 따르면 지난해 법인파산 신청 건수는 1004건으로 전년(955건)보다 5.1% 늘었다. 파산기업 대다수가 한계 중소기업으로 추정된다. 소상공인 폐업 점포 철거비 신청도 2만4542건으로 역대 최대다.
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953조4000억원(지난해 말 기준)에 달한다. 대한상공회의소가 674개 중소 제조 상장사의 부채 상황을 분석한 결과 조사 대상 기업의 이자비용은 전년 5070억원에서 지난해 3분기(누적) 6100억원으로 20.3% 급증했다. 전국 17개 지역 신용보증기금 대위변제율(차주가 원리금을 제때 갚지 못해 신보가 금융회사에 보증 비율만큼 대신 변제한 비율)도 지난해 1.09%로 전년보다 0.08%포인트 증가했다.
광역단체별로 지원하는 저금리 중소기업육성자금 정책에 대해서도 볼멘소리가 나온다. 남동공단의 한 중소기업 대표는 “육성자금을 갚고 나면 이후 1년간 못 빌리는데 중소기업에 대출이 안 되는 1년은 너무 긴 시간”이라고 지적했다.
코로나19로 피해를 본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상환 유예가 오는 9월 끝나는데 조금 더 기회를 달라는 목소리도 나온다. 이영식 가스연합회 전무는 “고금리 때문에 허덕이는 기업에 상환을 독촉하는 것은 돈 없는 사람한테 방 빼라는 격”이라고 호소했다.
최형창/김병근/강경주 기자 calling@hankyung.com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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